이야기 원형으로 나는 성서의 창세기를 꼽는다. 적시하자면 창세기 1장 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부분이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부분을 구전 문학보다 더 근원적인 이야기의 발화 지점으로 보았다. 빛이 모든 이야기의 첫 씨앗이라고 유추한 것이다. 빛이란 '드러나게' 하고 '드러내게'하는기능성을 동시에 지닌 것이다. 구전은 전달에 의존하고 그것을 기능으로 삼지만 빛은 드러나게 하고 드러내게 함으로써 훨씬 근원적인 문학적 기능성을 담보한다. 및에 의해 낯설게 보이는 세상, 그것이 문학의 진정한 기능성이다. 낯설지만 근원적인 것을 도출한다는 점에서 빛은 소설가적 기능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및의 시선과 같은 소설가 정신, 상상해보라.
- 박상우 소설가 중에서 -
빛을 비춘다는 것 그것이 거기 있음을 인지한다는 것.. 그것을 글이라는 매체로 옮기는 것 그것이 소설가의 일이다. 소설가의 내면에서는 빛비춤이 일어남과 동시에 내면에서 무언가 쓰여지고 있다.
무언가 깨어서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빛을 비추기 전에는 반응이 없다. 빛을 빛추는 순간 그것에 대한 내적반응이 생겨난다. 그것은 어떤 행위로 옮겨지게 된다.
코칭에서는 자각과 책임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내 앞에 돌이라는 장애물이 알아차려지는 순간 넘을지 돌아갈지 그것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책임이 저절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앎이라는 것은 이런 자각+책임이며.. 여기에서 말한 오롯이 빛비춤의 과정이다. 여기에서는 빛비춤 자체가 자각+책임을 이야기 한다.